저희 감천문화마을은 1950년대 6.25 피난민의 힘겨운 삶의 터전으로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족현대사의 한 단면과 흔적인 부산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산자락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계단식 집단 주거형태와 모든 길이 통하는 미로미로(美路迷路) 골목길의 경관은 감천만의 독특함을 보여줍니다.
감천의 이런 특색과 역사적 가치를 살리기 위해 지역 예술인들과 마을 주민들이 모여 시작한 『마을미술 프로젝트』는 감천문화마을 만들기 사업의 디딤돌이 되었으며 이 사업을 시작으로 각종 공모사업을 유치하여 2019년에는 308만여명이 방문하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감천문화마을이 만들어지기까지 함께 고민하고 힘써 주신 마을주민들과 마을만들기 계획가 및 활동가, 예술가들, 그리고 구청 및 동 주민센터 공무원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더 아름다운 감천문화마을이 될 수 있도록 다함께 노력하겠습니다.
감천(甘川, 甘:달, 川:내)의 옛 이름은 감내(甘內)로, 두개의 지명유래가 전해져 오고 있다. 하나는 ‘신성스러운 마을’이라는 의미로 「감(甘)」은 신(神:귀신)을 뜻하는 「검」, 「천(川)」은 마을을 뜻하는 「내」의 한자 표기에서 왔다는 것이다. 또 다른 유래로는 물이 좋아서 감천(甘泉)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져 오고있다.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로 당시 부산 중구 보수동에 거주하던 태극도(太極道) 신도와 피란민 4,000여명이 살 곳을 찾아 1955년 감천동으로 집단 이주하게 된다. 이들이 천마산과 옥녀봉 사이의 산비탈면에 10평도 안 되는 판잣집 1천여 동을 지어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한동안 마을은 ‘태극마을’이라고도 불리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마을 집집마다 화장실과 수도를 설치할 수 없어 공동화장실과 공동 우물을 사용하였으며 아직까지도 사용하거나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한국전쟁 당시 힘겨운 삶의 터전으로 산비탈에 만들어진 마을은 지금까지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산복도로는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함께 지역의 지형적 특성에 의해 조성되었다. 마을로 이주한 사람들은 ‘모든 길이 통해야 한다. 앞집이 뒷집을 가려서도 안 된다’는 두 가지 원칙에 따라 길을 내고 집을 지었다. 즉 골목으로 모든 집이 연결되면서도 서로의 생활권을 존중해주는 방법으로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원칙을 통해 지어진 집들은 산자락을 따라 계단식으로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게 되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초창기 판잣집은 사라지고 시멘트 블록과 콘크리트 집으로 차츰 바뀌게 되었다. 이후 마을재생사업의 일환으로 파스텔 톤의 알록달록한 건물 색상이 더해져 오늘날 마을만의 아름답고 독특한 경관 자원과 건축문화 자산의 역할을 하고 있는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